오늘에 남은 미션은 단 하나이다.
바로 칼퇴근이다.
(회사 앞 편의점)
서은재 대리는 보통 회사에서 도시락을 먹는다.
몇 번 직접 만들어서 도시락을 해 먹어 보려고 서너 번 노력해 봤지만,
잦은 야근으로 인해 저녁 없는 일상에서는 야식 메뉴 고르기도 힘들었다.
다음날 점심 도시락 식단과 요리까지 할 시간과 정신이 없었다.
대부분의 자취생들이 그러한 것처럼, 어느새 편의점 도시락 전문가가 은재도 되어 있었다.
매일 가던 세븐일레븐에 오늘도 미묘하게 아주 조금 많은 양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도시락을 들고 나왔다.
오늘 하루 중에 가장 뇌를 많이 쓴 순간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항상 계산해 주던 아르바이트 생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계산해 준 것 빼고는 평소와 똑같은 날이었다.
그만큼 은재에게 회사는 그저 그런 항상 반복되고 똑같고 지겨운 일상이었던 것이다.
(사내 휴게실 구석)
혼자 자리를 잡은 은재는 도시락을 열고, 에어팟을 끼고, 혼자만의 점심을 즐겼다.
그리고는 출근 전에 보다가 끊어진 영상을 다시 재생하였다.
영상 속 멋진 슈트 입은 자신감 넘치는 남자가 화면 너머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저는 몇년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대로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시작했던 부업이 이제는 저의 직업이 되었어요!
저는 월 천만원 벌 수 있는 이 비법을 여러분들께 무료로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이 기회 절대 놓치지 마세요! 여러분들도 할 수 있어요!''
(혼잣말) "그래 나 서은재는 이제 더 이상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가지지 않을 거다! 몇 연뒤 보란 듯이 성공해 보이겠다."
점심시간은 2배속으로 시간이 가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 맞다.
어느덧 들어가 봐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은재는 오늘 저녁에 동우와의 자리를 떠올리며 몇 시간만 더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사무실)
자리에 가자마자 은재는 서랍 시건장치를 풀고,
퇴사를 위해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퇴사 위시록"이라 스스로 명칭 한
퇴사 체크리스트가 담긴 작은 수첩을 꺼냈다.
가장 첫 장에 쓴 글, 그중에서도 세 번째 줄에 있는 글이 제일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이걸 꼭 이뤄내리라며 다짐하며 수첩을 다시 덮었다.
D-30 팀장님에게 당당하게 퇴사 선언하기D-30 민정 씨에게 퇴사 소식과 5만 원 받기6시 00분 00초 정시 칼퇴근
은재는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오후 근무 - 회의실)
은재는 이 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사실 마케터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더 있지만, 실제 그 능력을 발휘하여 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없다.
야근과 주말 잔업 등이 일상이긴 하지만 나름 자부심을 느끼고 일을 하고 있다.
일 복이 많다는 사주에 써진 얘기를 은재는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업무 대부분이 다양한 관계 구성원들 혹은 외부 거래처와 직접 소통을 하며 일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오전/오후는 보통 회의나 미팅 일정이 가득 차 있고,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야 진짜 해야 할 일들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4년 정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야근 중독자로 불리게 되었다.
회사에서는 대리를 빠르게 달아줬지만,
은재는 이미 바깥에 세상에 관심이 생겨버린 뒤였다.
(혼잣말) "오케이! 오늘 마지막 미팅! 이게 끝나면 바로 양치하고 짐 챙겨서 땡치면 바로 나간다."
마침 동우 인턴 선배님에게 메신저가 왔다.
(메신저 대화)
''푸줏간 생고기, 삼겹살 2인분, 목살 2인분, 세로 2병으로 시작"
"좋다! 역시 선배는 내 마음을 너무 잘 알아 우리 인턴~"
''회사 밖에서는 선배님이다 이 녀석아! 너 7시쯤 끝나겠지? 오늘도?"
"아니! 6시 땡치면 바로 나가서 자리 잡고 구워 놓을 거니까, 빨리 눈치 보다가 나와! 알겠지?"
''그래? 오늘 너희 팀 사무실에 다들 없나 보다. 알았어 이따 가게에서 보자. 구석지게 자리 잡는 거 RG?"
"RG RG"
은재 대리, 잠깐 시간 있나?
(현재 시간 오후 5시 58분, 사무실)
은재는 5분 뒤 퇴근을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였다.
최종화 팀장은 꼭 퇴근할 때 까먹을까 봐 미리 얘기한답시고 미팅을 하자고 하곤 한다.
금방 끝날 얘기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은재는 체크리스트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이렇게 말했다.
''은재 대리, 잠깐 시간 있나?"
"아니요! 시간 없습니다. 내일 출근해서 말씀 나누시죠"
순간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다행히 최종화 팀장은 온화한 성격이다.
살짝 당황한 눈치였지만 은재는 고삐를 놓치지 않았다.
여기서 더 밀어붙이지 않으면 6시에 갈 수 없다는 생각만이 몸을 지배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딱 6시네요, 제가 오늘은 일이 있어서요"
''그래 내일 보자고, 어 그럼 박 차장 잠깐만 일로 와볼래?"
(현재 시간 오후 6시 5분, 고깃집)
최팀장과 박 차장의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은재는 축지법을 쓴 것처럼 회사를 빠르게 탈출했다.
정확하게 5분 뒤 고깃집에 도착하고 주문을 완료했다.
그러고는 품에 있던 수첩을 꺼내 펜으로 세 번째 줄에 삭선을 그었다.
이번엔 장난스러운 메모를 덧붙였다. 살면서 이렇게 수첩을 열심히 쓴 적은 처음이라고 은재는 생각했다.
D-30 팀장님에게 당당하게 퇴사 선언하기D-30 민정 씨에게 퇴사 소식과 5만 원 받기6시 00분 00초 정시 칼퇴근< 최팀장에게 5시 58분에 일을 받을 뻔했으나 거절하고 나움 ㅋㅋ
은재야! 선배님 왔다! 고기 다 구웠냐?
동우가 곧 왔다.
고기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동우와 은재는 같은 대학교, 같은 회사까지 다니는 절친한 사이이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수능 때 점심시간 직후인 영어 시간에 잠을 잔 은재가 한 학번 후배이다.
그래서 선배님 후배님 하면서 서로를 부르며 지내고 있다.
그러나, 회사에는 은재가 4년 전에 먼저 들어왔다.
동우는 여러 가지 사회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하여 취업 구직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5개월 전에 갑자기 이 회사 인사팀 인턴으로 입사를 하게 된 것이다.
동우와 은재는 급작스럽게 더 친해지게 되었다.
이제는 거의 매일 보는 사이가 된 것이다.
당연히 고민 상담도 모두 공유하는 사이였다.
"인사팀에 소문났어? 내가 퇴사한다고?"
''그래 이 녀석아, 인사팀장이 나 불러서 얘기해 주더라, 너랑 친한데 한번 알아보라고 왜 그런 건지"
"내가 얘기한 거 그대로 가서 얘기하기만 해 봐라! 이 배신자 뒤통수치는 놈아"
''나 못 믿냐? 이번엔 뭔데 그래, 너 저번에도 퇴사 시도했던 번복했던 전력이 있잖아"
은재는 동우가 너무나 좋은 친구이자 선배이자 후배이자 뭐 그런 사이지만 한 가지 조심하는 게 있다.
바로 동우는 생긴 것과 다르게 너무 입이 가볍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진짜 이유 대신 평범한 이유를 나열했다.
당연히 퇴사 체크리스트 수첩도 얘기해 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마무리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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